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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9일 화요일

한니발 전쟁 - 시오노 나나미

1808, 로마인 이야기-한니발 전쟁.

우선 번역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다. 우선 그것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듯.

로마가 그 옛날 어떻게 그렇게 번성한 문화와 기술들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우리의 역사와 비교하면 정말 대단한 성취인듯 하다. 그때 우리는 겨우 고조선이고 남겨진 역사도 거의 없다. 그 옛날의 일에 대한 기록도 많고 유적도 많은 것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한 일인것 같다. 연구의 깊이가 깊다.

로마인 이야기 2권은 한니발 전쟁인데. 주로 카라타고와의 전쟁이 그 중심 이야기다. 기원전 264년부터 카르타고 멸망까지 146년까지의 이야기 이다.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지중해 바다의 주도권을 위한 싸움으로 주로 시칠리아섬를 그 주무대로 벌어졌다. 이때 로마는 해군 전력이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이 전쟁을 계기로 실력을 빠르게 축적하게 된다. 후의 전쟁에서 바다의 주도권을 가진것이 큰 이점이 되어 전략을 펴는 것에도 많은 도움이 되게 된다.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카르타고는 에스파냐쪽으로 눈을 돌려 그쪽을 지배하게 되고 거기서 한니발이라는 영웅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로마 본토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끝내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이것이 2차 포에니 전쟁으로 기록된다. 알프스 산맥을 넘은 첫 군대인것으로 기록된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넘게 되겠지.. 이 한니발이라는 사람은 기병을 잘 사용해서 머리수 전쟁에서 전술 전략을 이용하는 전쟁으로 바꾼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고, 로마를 쓰러뜨리러면 로마 동맹을 깨야 한다고 생각해서 로마인은 포로로 잡으면 다 죽였지만, 동맹들에게는 아무조건 없이 풀어주어 그 사실을 널리 알리게 했다. 실제로도 나중에 로마의 동맹을 깨고 한니발에게 붙는 동맹이 생겼다. 그것으로 이탈리아 본토에서도 끈질기게 전쟁을 계속 할 수 있었다. 본국인 카르타고의 지원은 해상의 주도권을 로마가 쥐고 있었기에 거의 받을수 없었음에도 한니발이 선전을 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된다. 걸출한 한니발을 상대로 로마는 정면대결은 피하고 한니발의 지원을 끊는 전략을 사용하게 되고, 여러 명의 집정관으로 나뉘어 한니발 군을 정신없게 흔드는 전략을 사용했고 실제로 이 전략은 효과가 있었다.

한니발의 라이벌로 스키피오라는 젊은 영웅이 탄생하는데, 한니발의 본고지인 에스파냐를 정복함으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스키피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카르타고 본국까지 들어가 끝내 카르타고에게 휴전을 받아내게 되고 한니발은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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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의 노잡이를 필요로하는 3단층 갤리선은 준투원이 한척당 100명. 5단층 갤리선의 노잡이는 300명, 전투원도 300명정도. 즉 5단층이 3배 유리한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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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술에 자신이 없는 로마인은 까마귀를 이용하여 해상전투를 육상 전투로 바꾸려고 생각한 것이다. 까마귀는 180도 방향 전환도 가능하다. 이를 이용해서 카르타고와의 첫 해상전투에서 로마는 대승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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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47년은 로마에서는 5년마다 시행되는 국세조사의 해였다. 시민권을 가진 17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수와 경제상태를 조사하는 것인데 남자수는 보통은 10%넘게 늘어나지만 그해에는 17%가 줄었다. 주 원인은 해난사고에 의한 손실이었다. (기원전에 이미 통계를 내고 있었다니 얘네 뭐냐..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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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뒤에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장래는 결정된다. 승패는 이미 판가람났으니까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문제는 거기서 얻은 경험을 어떻게 살리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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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의 주력은 상류층과 중류층의 로마시민들로 구성된 중무장 보병이다. 즉 높은 계급의 사람이 더 큰 병역의 의무를 졌다.
중대는 20개의 소대로 나뉘고, 각 소대는 120명정도로 구성. 이것이 백인대이고 백인대의 대장이 백인대장이고, 이는 백인대 소대원의 투표로 정해졌다. 즉 전쟁의 베터랑이 백인대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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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를 넘은지 한달후, 한니발 밑에 모여든 갈리아인(프랑스 지역)은 1만명을 넘었다. 3만 육천으로 늘어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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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적으로 전투를 하려면 기병이 필요한데 왜 로마인은 기병력을 증강하려하지 않았을까?
500년전부터 중무장 보병으로 잘해왔다. 지금까지 줄곧 유효했던 것을 변혁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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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자는 서기 11시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보급된다 기사가 중세의 꽃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등자가 출현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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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이 내가 안찰관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니 나는 충분히 안찰관을 맡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 나이 제한에 걸린 스피키오가 한 말. 그는 결국 안찰관에 임명됨. 한니발과 함께 포에니 전쟁의 다른 영웅 탄생.

알렉산드로 대왕의 수제자가 한니발이라면, 스피키오는 한니발의 수제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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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46년은 온건한 제국주의에서 엄격한 제국주의로 방침을 바꾼 해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된다. 그리스 3대 도시였던 코린트를 소멸시켜 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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